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단 편집) === 베테랑 선호 성향 === >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쓸 생각은 안 한다고. 예를 들어 작년에 [[안치용(야구)|안치용]]이라든지 그 [[최동수]] 같이 SK에서, '''버리기 일보 직전 아이들'''이 일하는 거에요.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쓰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필요한 거에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위기 때, 어려울 때 걔네들이 한다니까. 경험 갖고.]]" > ---- > - [[https://www.youtube.com/watch?v=1bMPa_5PVnQ|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김성근 감독은 지도자 시절 내내 외부로부터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노장 선수를 사서 쓰는데 열을 올렸다. 이렇게 영입된 노장 선수들의 대부분은 1,2군을 오가는 백업선수로 활약하다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백업감이나마 많이 영입해 두면 단기적으로 선수층을 두껍게 만드는 데 큰 효과를 내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이는 어느 정도 효과를 냈다. 이러한 이유로 김성근 감독은 구단에 수시로 선수 영입을 요청하며, 타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을 자유계약 또는 현금트레이드로 적극적으로 영입한다. 실제로 이 노장들로 구멍을 잘 메웠고 꽤 쏠쏠하게 활용했으며, 크게 터지는 선수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근은 애초에 노장을 풀 주전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다. 그저 필요할 때 한번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비싼 돈을 들이게 된다. 문제는 노장 선수들의 경우 연봉이 높은 편이라 가성비가 매우 떨어져 구단 경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에 부담을 느낀 구단이 김성근의 이런 묻지마식 영입 요구를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구단이 지원을 안해준다고 하면서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김성근의 집착적인 노장선수 영입은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3월 9일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태평양 그룹은 그해 겨울,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김성근 영입을 필두로 청보 핀토스 시절의 코칭 스태프들을 전부 물갈이하고,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들어갔다. 이때 신임 감독으로 임명된 김성근은 구단에 일본어로 된 21개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 결과 태평양은 1989 시즌에 앞서 비시즌 기간 동안 [[이충우]](1989년 은퇴), [[정영기]](1990년 은퇴), [[천창호]](1990년 은퇴), [[김한근]](1990년 은퇴), [[이광길]](1992년 은퇴) 등 은퇴를 앞둔 노장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후에도 [[김경문]](1991년 은퇴), [[오영일]](1990년 은퇴), [[이길환]](1990년 은퇴) 등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노장 선수들이 시즌 동안 계속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초반 어느 정도 활약에도 불구, 대부분 급격한 기량 쇠퇴를 겪으면서 김성근 경질을 전후로 은퇴 수순을 밟았다.[* 기존 서술에서는 유망주를 버리며 트레이드를 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이 시기의 트레이드는 현재와는 달라 대부분 현금 트레이드로 이루어졌다. 초창기 한국 야구는 지역색이 굉장히 강했던 데다가 트레이드가 고향팀이 해당 선수를 버린다는 의미 혹은 징계 수준로 받아들여졌던 만큼, 이제 팀에서 필요도가 별로 없어 쫓겨나는 선수들을 돈으로 사가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1990년 11월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성근은 우승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구단에 강력히 요청하여 1991시즌을 앞두고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569151|무려 일곱명의 노장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OB의 [[윤석환]](1991년 은퇴), [[조범현]](1992년 은퇴), [[신경식(야구)|신경식]](1995년 은퇴), 태평양의 [[이광길]](1992년 은퇴), LG의 [[최일언]](1992년 은퇴), 최홍석(1991년 은퇴), 롯데의 [[허규옥]](1992년 은퇴)이 그들이었다. 이들 노장 선수 중 최일언이 1991년 9승 6패로 어느 정도 활약하였고, 신경식이 트레이드 첫 해 3할 타율과 최다안타 2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외 선수들은 대부분 삼성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김성근 경질과 동시에 은퇴 수순을 밟게 된다. 쌍방울 감독 시절은 약간 독특한데, 본래 쌍방울은 김성근을 영입하면서 '''전해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원을 스카우트 비용으로 배정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다만 1996년에는 생각보다 주워온 선수가 별로 없었는데, 1996년 영입된 노장 선수로는 [[김실]], [[김성래]], [[박정현(투수)|박정현]]이 있다. 이 중 [[김실]] 영입은 김실의 커리어 하이로 이어지며 나름 성과를 낸 편이며, 김성래 또한 역할을 톡톡이 한 편. 다만 김성근 감독 이전부터 쌍방울은 타팀에서 선수 주워오는 경향이 강했던 만큼, 8개 구단 중에서 유독 평균연령이 높은 팀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1996년의 성과는 이용일 전 사무총장의 말처럼, 그렇게 큰 지원이 없었음에도 거둬낸 성과라고 볼 수 있는 편.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9621#home|#]] 쌍방울에서의 노장 사랑이 본격화된 건 1996년 성과를 내고 지원이 더 강해진 1997년이다. 이 시기 쌍방울에는 [[윤형배]], [[한대화]], [[이종두]] 등 한때 한가닥 했지만 기량이 많이 떨어진 선수들이 이 시기 대거 영입된다. 때문에 선수 연봉 지출액도 수직상승했으며, 기어이 "페이롤 1위"를 찍기에 이른다.[* 페이롤 1위는 쌍방울 감독 첫 해였던 1996년이 아니라 1997년으로, 이는 쌍방울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까지 엮이면서 상승폭이 반영된 결과이기는 하다. 어쨌든 이는 리그를 지배하던 최강팀이었던 해태는 물론 당시 엄청난 현금 트레이드를 진행해오기로 유명해 부자구단이라고 불리던 '''삼성, 현대'''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다는 것. 즉 선수 하나하나의 연봉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압도적이었다.][* 여담으로 고참 선수들이 많아 [[해태 타이거즈]] 다음으로 팀내 군기가 강했다고 한다. 게다가 훈련량까지 많아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 SK 감독 시절에도 타 팀에서 방출된 [[가득염]], [[안경현]], [[윤재국]]을 자유계약으로 데려왔고, [[최동수]], [[권용관]], [[안치용(야구)|안치용]], [[이재영(야구선수)|이재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노장 선수를 열심히 수집하고 젊은 선수들은 딴 팀에 내줬다. 노장 선수만 트레이드해 온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125448|"노장 선수들을 SK로 데려왔지만 이제부터 젊게 만들 것]]"이라는 면피성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한화 이글스 감독에 부임하고 나서도 이러한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곧바로 [[권용관]], [[임경완]], [[오윤(야구)|오윤]] 등 타 팀에서 풀린 방출 선수를 영입하였으며, FA로 [[송은범]]과 [[배영수]]를 영입하였다.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도 트레이드로 30줄에 들어선 [[이성열(1984)|이성열]]과 [[허도환]]을 데려오는 등 여전히 노장 선수 영입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화가 10개 구단 중 연봉총액 1위를 찍은 것은 덤이다. 2016년에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장민석]], [[차일목]], [[송신영]]을 데려왔고, FA 자격을 얻은 [[정우람]]과 [[심수창]]을 영입했으며, 두산의 코치직을 뿌리치고 나온 [[이재우]]를 영입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